이 책은 1955년 5월 「조선일보」, 같은 해 7월 「월간 희망」, 같은 해 12월 「아리랑」에 각각 실린 박인환의 『19일간의 아메리카』, 『서북 미주의 항구를 돌아』, 『미국에 사는 한국 이민』을 한 권으로 엮은 것이다.
6ㆍ25 이후 폐허가 된 조국을 잠시 떠나 저자가 직접 마주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현장은 놀라움 그 자체였으리라. 저자는 1955년 당시 미국의 풍요와 질서, 한국인에 대한 미국의 호감, 교민 사회의 일면을 잘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은 띄어쓰기와 몇 군데 오기(誤記)만을 수정하여 저자의 생각과 표현이 오늘날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원문을 유지하였다. 추가로 원문에서 따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각주로 부연하였다.
해방 이후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밤의 미매장」, 「목마와 숙녀」 등을 저술한 시인. 1939년 서울 덕수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41년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8·15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 뒤 상경하여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광균(金光均)·이한직(李漢稷)·김수영(金洙暎)·김경린(金璟麟)·오장환(吳章煥) 등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1948년 서점을 그만두면서 이정숙(李丁淑)과 혼인하였다. 그 해에 자유신문사, 이듬해에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하기도 하였다.1948년에는 김병욱(金秉旭)·김경린 등과 동인지 『신시론(新詩論)』을 발간하였으며, 1950년에는 김차영(金次榮)·김규동(金奎東)·이봉래(李奉來) 등과 피난지 부산에서 동인 ‘후반기(後半紀)’를 결성하여 모더니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51년에는 육군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한 바 있고, 1955년에는 직장인 대한해운공사의 일 관계로 남해호(南海號) 사무장의 임무를 띠고 미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955년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을 낸 뒤 이듬해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박인환(朴寅煥))